ORIOLE1990년, 1200 bps 모뎀 키드 |
불면의 묵흑자여!
한잔의 술이 그리워질 날이 가까운데 무엇을 망설이나.
짹짹대는 참새 소리 한 귀로 흘리고
달달구리 감언 귀에 담고
모니터를 벗삼아
한잔해.
2025년 6월 8일, 23시 41분
사람을 나이 들었다고 존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 70 넘게 먹고도 사람새낀가 싶은 인간이 한둘이 아닙니다. 멀쩡한 외모 점잖은 어투 뒤로 추악한 짓거리를 하는 인간말종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사람은 오래 보아야 진면목을 볼 수 있으니 쉽게 믿지 마세요. 대부분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역사 속에 있습니다.
2025년 5월 3일, 23시 10분
산책로 보도블록 아래에 집을 짓고 사는 개미들이 서로 무슨 얘기를 하고 그들간에는 어떤 갈등이 있는지 관심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주 만물 수많은 생명체를 만든 신이 있다면 같은 입장 아니겠습니까.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평생을 통해 보기 힘든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의는 스스로 구현하는게 맞지 기도빨 세워서는 답이 없어요.
2025년 3월 25일, 17시 38분
원작의 근간이 되는 대상이나 주제에 뜬금없는 PC로 변형을 주려는 시도는 자칫 열등감의 표현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흰색을 파란색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 마련이고 저의를 의심하기 마련이지요.
2025년 3월 11일, 14시 04분
작금의 이토록 선명한 현상에 의견이 갈릴 수 있다는 것이 지구가 지옥별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싶고, 정말 나의 삶을 위협하는 적은 누구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의외로 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5년 1월 7일, 01시 21분
q 에디터로 클리퍼 코드 짜던 시절이 제일 좋았던 듯. 밤새며 한텀에서 엘프의 탑 머드를 하던 시절이 제일 좋았던 듯. 노래도 그 시절 노래가 좋고. 사람도 그 시절 사귄 사람들이 좋고.
2025년 1월 4일, 22시 37분
인류를 지적, 기술적으로 진일보로 이끄는 것은 극극소수의 엘리트들 입니다. 나머지 절대다수 중 또 극소수의 조금 똑똑한 사람들은 이 엘리트들이 이뤄놓은 업적 위에서 변주를 하고 나머지 인류는 그저 완성된 지식을 머리에 집어 넣을 뿐이지요. 이것이 절대 다수인 우리가 하는 공부의 본질입니다. 대단한 것이 아니죠. 우리는 그냥 지식전달자에 불과할 뿐 입니다. 그런데 이 지위도 이제 기술의 발전으로 위태롭습니다. AI가 주객전도 Wag The Dog 시대를 앞당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그럴일 없을테니까요.
2025년 1월 3일, 23시 33분
최근 스마트폰 교체 사이클이 평균 3년이 넘어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약정이 원인이니 기능이 충분하니 뭐니 하지만 결국 미친 가격이 주원인일 듯. 최신 스마트폰이 50만원이면 매년 교체하지 3년을 기다릴 사람이 없음. 현실은 대체 뭘 하는지 모를 AI 장착하고 200만원. 서민은 등골 브레이커 테크에는 관심 끊는 것이 최선일 수 밖에요.
2024년 12월 30일, 22시 52분
사람들이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에 무임승차 해서 단물만 쪽쪽 빨아먹고 처자빠져 있으면 그게 사람인지 개새끼인지 구분이 안가는 지경이 아닙니까.
2024년 12월 11일, 12시 08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역사는 1223년 고려 시대 때로부터 시작하여 800년간의 지속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백 년의 기간 동안 수많은 회유와 토벌 등이 이어졌고 불과 백여 년 전에는 나라를 빼앗기기까지 했습니다. 앞으로의 200년이 이런 추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국민은 물론이고 특히 지도자는 일본을 마음으로 경계하고 불가근 불가원의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근 천년의 침략의 역사 앞에 반박은 불가합니다.
2024년 11월 29일, 09시 09분
최근 수년간 압축파일을 다룬 기억이 없지만, 예전에는 정말 필수였어요. 도스 시절에는 BBS에 파일을 업로드 할 때 lharc, pkarc, arj, pkzip 등을 썼었고 윈도로 넘어와서는 ace, 7zip을 쓴 기억도 나구요. 한번은 엘프의 탑 2 머드 소스를 arj로 압축하면서 암호를 걸어놨는데 그 암호를 잊어먹어서 풀지도 못하고 고심하다가 친구가 브루트 방식으로 하루 꼬박 걸려 풀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 그리고 위키피디아에 초기 압축파일 관련 스토리가 잘 정리되어 있어 한번 읽어볼 만 합니다.
2024년 11월 8일, 16시 28분
작년에 제로하나 컴퓨터 박물관의 폐관 소식을 접하고 아쉬워 하던 차에 근황을 알아보니 제로하나 컴퓨터 박물관의 모든 소장품들이 넥슨 컴퓨터 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과 함께 문기현 관장님의 컴퓨터에 대한 깊은 애정을 넥슨 컴퓨터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으니 반갑고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제주에 갈 핑계가 또 하나 생겨서 기쁩니다.
2024년 11월 6일, 23시 21분
삶에서 예상은 하되 기대는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그마한 해프닝을 통해 깨닫습니다. 예상과 기대는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점이 있어요. 예상은 사물과 사건에 대해 객관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고 기대는 주관을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주관이 개입되면 결과에 연연하게 되고 기뻐하거나 실망하게 되지요. 삶은 희노애락이라고 하지만 명경지수만큼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매사에 기대를 하지말고 예상하는 자세를 유지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되고 인생이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2024년 10월 2일, 18시 01분
부산 청사포에 카이막 맛집이 있다고 해서 부리나케 찾아가 융드립 한 잔과 카이막을 주문해서 2층 창가에 앉아 진한 커피 한 모금에 달달구리 카이막을 즐기다 보니 문득 창밖 청사포 바다가 예뻐서 사진 한장 찍었는데 이상하게 느껴지는 기시감. 구글 포토를 열어 검색해 보니 몇 년 전에 찍은 똑같은 구도의 사진. 심지어 앉은 자리도 똑같았네요. ㅋ
2024년 9월 29일, 14시 06분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은 우리 인간의 이야기일까? 섭종 공지가 뜬 게임의 NPC들의 이야기일까?
2024년 9월 18일, 22시 15분
방구석 예언가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만 참으면 이불킥을 면할 수 있으니 뭐라도 된 양 지적질하고 싶고 궁예질 하고 싶고 내가 낸데 하고 싶어 미치겠다 싶으면 한잔해.
2024년 8월 5일, 23시 43분
TV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패널들은 토론을 통해 서로를 설득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아니죠. 설득의 대상은 시청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시청하면서 패널들 노답이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2024년 6월 28일, 16시 56분
한번 속으면 피해자, 두번 속으면 바보, 세번 속으면 공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소한 공범은 되지 않으려면 현명한 판단과 처신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2024년 6월 6일, 15시 22분
만년필을 지인에게 선물하기에는 진입장벽이 큽니다. 첫째, 필기하다가 캡을 연 채로 놔두면 닙이 마르고 다시 쓸려면 흔들고 꾹꾹이 해야 하는 점, 둘째, 쓰다 보면 손기름 때문에 헛발질 나고 즉시 사용 경험이 최악으로 떨어짐. 셋째, 종이도 가려서 써야 해서 일반 저렴이 노트에서 삐쭉빼쭉 페더링 나는 것 보고 실망하는 사람 많음. 넷째, 잉크 충전을 자주 해야 해서 다 쓰고 나면 귀찮아서 그냥 안 쓰게 됨. 다섯째, 선물용 만년필은 대체로 메이저 브랜드 제품이고 고가인 점. 이쯤 되면 내가 나한테 선물하는 것이 합당한 선택입니다.
2024년 5월 28일, 00시 05분
김준녕 작가는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의 후속작을 낼 계획이 있는지.. 나만 막연히 기대 중인 건가?
2024년 5월 19일, 01시 56분
완전 잡담 근거 제로 뇌피셜. 지금 한창 이슈인 인공지능은 AGI 수준에 도달하는데 결국 실패할 것 같다. 누군가의 희망회로인 특이점은 오지 않을 것이고 로봇과 에너지 기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 기술은 상당 기간 정체 상태로 머물며 인류 멸망을 늦추지 못하고 다음 세대의 인류에게는 더 많은 아르키메데스와 아인슈타인과 폰 노이만이 함께 하길 기원하면서 바통을 넘기지 않을까.
2024년 4월 23일, 00시 45분
대학생 때는 nkp 띄우고 보석글 쓰다가 군대 가서는 전산실에서 하나워드를 썼는데 A4지에 와꾸 그릴 때 그림자까지 넣어서 만들었죠. 우리나라 사람들 예나 지금이나 문서에 와꾸 넣는 거 엄청 좋아합니다. 당시에 전산실에는 포트란으로 데이터 처리만 하던 구닥다리 메인프레임이 있었는데 말년쯤 되니 갑자기 HP 워크스테이션 들어와서 X윈도에서 쾌적하게 테트리스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2024년 4월 20일, 12시 57분
나의 80~90년대 추억 속 노래들의 민낯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 마치 영화 올드보이의 보라색 상자 같달까. 몰라도 되는 것은 모른 척 넘어가도 좋은 경우가 있으니까요.
2024년 4월 20일, 00시 57분
여러 사람이 모여 무엇을 시작할 때면 늘 따라오는 호들갑과 거창한 포부는 창피한 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경향에서 비롯합니다. 인간사에서 뭐 그리 영속적인 것이 많다고 그중에 하나인 것처럼, 과거의 오류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것처럼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인데요. 용두사미는 인류사의 전통입니다.
2024년 3월 29일, 22시 40분
인생을 살아보니 강약약강 하는 인간이 가장 허섭한 부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지나치게 입체적인 사람을 평가할 때도 이런 면을 잘 보면 99% 확률로 옥석을 가릴 수 있습니다. 1%의 예외는 관용적 표현으로 남겨두지만 실제로는 없습니다.
2024년 3월 12일, 17시 00분
착하게 사는 것은 현명한 행동입니다. 사후세계가 있는지는 불확실하고 있다고 해서 전통적인 인과율이 적용되는지도 불가지이지만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개인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선의 가치관 안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따라서 착하게 인생을 사는 것은 현실의 순간에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인생의 장로에서 행복을 누리고 아울러 더 높은 가치 실현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언제나 현명합니다.
2024년 3월 12일, 00시 29분
우두머리 까마귀가 온다고 어중이떠중이 까마귀 떼가 우르르 모인 작태가 심히 보기 민망하더라. 근묵자흑이라 백로 같은 가인들이 임할 곳이 못 되더라.
2024년 2월 13일, 20시 55분
인간이 집단을 이루는 순간부터 평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평등은 실현 불가능하지만 추구해야 할 이상이고 모두가 용인할 만한 수준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이 힘겨운 현실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올바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분들은 이상주의자들이고 현실에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오려면 온 인류가 해탈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진지한 관찰이 결여된 논리에 휩싸여 허둥대다가는 남에게 이용당하는 인생이 되기 십상입니다.
2023년 6월 5일, 12시 17분
유튜브에 우리 태양계 행성들이 자전을 하면서 태양을 공전하고 우리 태양 역시 우리 은하를 공전하며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제3자 관점에서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칼 세이건의 pale blue dot과 더불어 강렬한 영감을 주었는데요, 우리 인간은 물론이고 우주의 모든 것들은 그 태어남과 동시에 찰나의 순간도 한 자리에 머문 적이 없는 여행자라는 사실이죠. 인생은 여행과 같다는 동서양의 격언은 참으로 깊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2023년 4월 25일, 15시 12분
20년도 훨씬 더 전 어느 날 퇴근시간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사설 BBS에서 알게 된 지니어스라는 아이디를 쓰던 그 친구는 그때 말처럼 유학 가서 IBM에 들어갔을까? 희망차게 포부를 말하던 그 모습이 가끔 떠오릅니다. 그때는 나도 꿈이 있었는데 어느새인가 희미해져 버렸네요.
2023년 4월 22일, 22시 10분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두 번째 이야기 포목장수 잔노토와 유대인 아브라함 편은 읽고 나서 혼자서 어리둥절하다가 다른 분의 해석을 읽고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고 '보카치오 이 분 완전 풍자 만렙이시구나!'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2023년 4월 19일, 21시 50분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한가위 보름달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은 삭풍의 그믐달
사랑을 되찾으려 나의 모험은 시작
구름을 넘어 별을 딛고 은하수를 건너
사랑이라는 보물을 찾아 방랑
모험의 끝에 발견한 반짝이는 보석함
그 안에 있는건 말라버린 눈물 자국
너의 돌아선 맘 나의 되돌릴 수 없는 시간
그믐이 지나 떠오르는 저기 저 새로운 달
나의 달도 이제는 새롭게 떠오르네
2022년 8월 2일, 14시 54분
南으로 창을 낸
제주 바닷가 언덕 위 자그마한 2층 집
아침 햇살이 바다를 파랗게 물들일 때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이 팔랑거리고
최애하는 음악이 흐르면
파란 바닷물이 튕겨낸 햇살과
음악의 파동이 만나
방안엔 반짝이는 햇살 거미줄에
선율이 걸려 나풀댄다
낭만의 아침이여, 낭만의 바다여
아름다운 순간에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면
행복과 아쉬움과 세월에 대해 생각하다
끝내 서러움이 밀려온다
이렇게 눈부신 날에도
그리운 사람은
언제나 마음 한 켠에 있다
봄날의 눈부심이 가득한
낭만의 아침에
파란 파도에 부딪혀
하얗게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그리운 이가 그립다
2022년 3월 12일, 자정을 지나
늦가을 노을이 지는 저녁, 쌀쌀한 바람에 이리저리 가벼운 소리를 내며 길모퉁이 구석진 곳을 나뒹구는 낙엽에는 가버린 사람들의 기억이 말라있다. 어떤 것은 온전히 잎사귀 모습을 갖추었으나 또 어떤 것은 반쯤은 부서져 메마른 줄기에 부스러기 같은 기억의 파편이 아슬하게 붙어있다. 낙엽은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회오리바람이 한줄기 불때마다 이름 모를 이들의 기억이 사라진다.
기억은 풍경과 심상心像을 마음이라는 도화지에 그린 것이다. 무릇 한 사람의 기억이란 세상 사람이 무관심하기가 십상十常이고 행여 관심 있어 되내어 보는 이라도 그저 이러니저러니 비슷한 얘기만 늘어놓을 뿐 정성들여 한붓 한붓 그린 본인 외에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온전히 자기만의 영역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림이 사람의 기억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사람이 사라지면 그런 기억도 말라 부서지고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린다.
예전에는 가을이면 낙엽 밟는 소리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2021년 8월 19일, 10시 57분
십 년도 훨씬 전 어느 날 오전에 아버지께서 자전거 뒷 짐칸에 채소를 잔뜩 싣고 집에 오신 적이 있었다. 반여 농산물 도매시장이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다녀오신 것이었다. 그때는 반여 농산물 도매시장이 어디쯤에 있는지 잘 모르고 대략적인 위치만 어렴풋이 짐작했었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아버지가 계신 정관을 다녀올 때면 늘 1010번 버스를 타곤 한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타고 터널을 2개 통과해서 석대 화훼단지로 접어들면 반여 농산물 도매시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차창 밖으로 시장 입구가 보이고 건널목이 보이고 수영강을 가로지르는 동천교가 보일 때면 아버지가 정성스레 칠한 은색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가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럴 리가 없지만 괜히 지나가는 자전거라도 있으면 아버지신가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집으로 오는 길에 자전거로 오르기 힘든 가파른 언덕길이 있는데 어떻게 올라가셨을까, 내려서 힘들게 끌고 올라가셨겠지. 언덕을 넘어 정수장을 지나고 충렬사를 지나서 집까지 차로도 수십 분이 걸리는 길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번 이런저런 생각 속에 그렇게 아버지와 교감하는 순간은 짧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하게 새겨진다.
2021년 5월 16일, 00시 05분
우리는 종종 현재 자신의 한심한 처지를 과거 자신의 말로 비판할 수 있다. 일종의 거울치료라고 할 수 있는데 남몰래 느끼는 심상이라면 혼자 얼굴 붉히고 말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만한 굴욕이 없다. 재고하여 일언하고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않으며 주제를 넘는 언행을 삼가함을 생활의 금과옥조로 삼으면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떠오르는 번뇌가 줄어들 터이다.
2021년 1월 26일, 19시 17분
부산 서구에서는 쪽자라고 했는데 골목길 한귀퉁이 좌판에서 아저씨가 연탄불에 설탕을 녹여서 소다 넣고 부풀어오르면 설탕을 흩뿌린 철판에다가 탁쳐서 놓고 손잡이 달린 동그란 누르개로 적당히 누른 다음 별모양의 도장을 찍어서 주면 아이들이 바늘 끝에 침발라가면서 별모양 홈에 하나하나 구멍뚫어서 완성해서 보여주면 하나 더 만들어주곤 했어요. 연탄불에 자기가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었는데 쪽자에 설탕을 넣고 슬슬 저어 설탕이 녹으면 대나무 쪼개서 만든 젓가락에 소다를 콕 찍어서 휘리릭 돌리면 황갈색으로 점점 부풀어 오르는게 신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좀 더 크게 해서 먹겠다고 소다 너무 많이 넣어서 쓴 맛이 났던 기억도 나네요 ㅎㅎ
2020년 12월 26일, 16시 51분 58초
아마도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입학 전쯤이었나 싶다. 아버지와 컴퓨터를 사러 경성대 앞에 있는 어느 컴퓨터 가게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대연동 가는 버스에서 내려 아버지를 따라 그 가게를 찾아 걷는데 이상하게 산길이 나오고 주위에 논밭이 보이고 주민들이 이방인 보듯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마도 아버지께서도 초행이라 길을 잘 모르신 건데 어떻게 걷다 보니 산을 넘어 경성대 안으로 들어가서 정문으로 나와서 가게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몇 년이 지나 경성대에 다니던 친구 연구실에 놀러 갈 때도 그때 일이 기억 안 났고, 20여 년이 지나 볼일이 있어 경성대 주변을 갈 때도 한 번도 생각이 안 났는데 오늘 문득 그때 일이 떠오른다. 아버지와의 이런 사소한 기억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2020년 12월 2일, 23시 18분
맞습니다. 엄밀히 볼 때 7-90년대 가수들에 비해서 요즘 아이돌을 포함한 가수들이 평균적으로 실력면에서 월등합니다. 동네에서 노래 잘 부르고 춤 잘춘다고 가수해봐라 하던 시절과 오디션과 10여년의 트레이닝을 거친 세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요, 괜히 지난 시절 가수들에 정이 가는 것은 추억속의 재회라고 해야겠죠.
2020년 10월 27일, 12시 48분 06초
제가 국민학생 때까지는 육고기도 잘 먹고 생선도 고등어 구운 거, 납세미 졸인 거 어머니가 뼈 발라서 숟가락에 얹어주면 낼름낼름 얄밉게도 잘도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중학생 때였나요? 이동기의 논개가 한창 유행할 때였는데 집이 시장 입구 바로 맞은편이라 가끔 시장을 가로질러서 귀가를 했는데 하루는 시장 입구의 닭집 앞에 커다랗고 깊이가 깊은 빨간 다라이가 있었는데 거기서 닭집 사장님이 닭 모가지를 잡고는 칼로 댕강 자르는 장면을 봤었습니다. 스치듯 지나치면서 본 그 장면이 트라우마가 된 것인지 그 때 이후로 고기에는 손이 잘 안 가더군요.
그 후에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애니에서 고기를 안 먹는 주인공 폴이 마왕과 현피뜨러 이상한 나라로 갔는데 각종 채소들이 자기들도 생명이 있다면서 주인공을 다구리 하는 에피소드를 보면서 내 얘긴가 했던 기억도 나네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고기에는 손이 잘 안가네요. 고기값도 비싼데 다행인 듯..
2020년 9월 14일, 22시 11분 41초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이 해선 안될 말이긴 한데 일반인이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심상을 표현할 수는 있는 거죠. 국민이 절대선이라 가정하고 상황을 판단하면 권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집단적으로 오류에 빠지는 경우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발전적 문제 제기가 이를 막는 방법이 될 수 있어요.
2020년 8월 14일, 11시 41분
계급계층 의식이 없어서 그렇죠. 민주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계급들이 법질서 아래에서 연대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계급의식이 희미하고 무감각해지면 타 계급으로부터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권리도 지키지 못하고 계급을 이어주는 계단에 발도 올려보지 못하고 개인으로서는 그냥 그렇게 그 안에서 쳇바퀴 도는 인생 나락에 빠지는 거죠. 오지랖 부리기 전에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2020년 7월 23일, 22시 18분
좀 다른 얘기지만 현대의 디지털 스토리지가 영구 보존력 면에서 동굴벽화보다 못할 수 있다는 얘기도 있죠. 백업테이프, 하드디스크, 스스디 등은 필연적으로 재생장치와 디스플레이 장치를 필요로 하는데 인류멸망 또는 리셋 후 아무리 잘 보존된 스토리지가 있어도 재생장치가 없으면 무용지물인데다 재생장치와 디스플레이가 같이 있어도 수천 년 또는 수만 년 후의 작동을 보장할 수 없으며 애초에 리셋 후의 인류가 이런 유물의 가치를 인지할 수 있는 단계까지 도달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르키메데스 같은 인물이 반드시 출현한다고 단정하기는 힘든 것이죠. 어쩌면 현 인류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일 수도 있는 거죠.
2020년 7월 22일, 00시 20분
애플이 원하고 강제하는 음악 파일을 관리하는 방법이 제 사고방식과는 10억 광년 쯤의 간극이 있어서 포기한 지 꽤 됩니다. 대체 왜 다음에 물음표가 한 10개쯤 붙은 물음이 10년을 넘었으니 포기할 만 하지요. 다행히도 세상은 스트리밍이 더 편하게 바뀌었고 음악 파일 태그 일일히 수정하는 열정도 이젠 없고 다 부질없는 뭐랄까 대체 왜 명제가 또 대두되는데 태그 수정하며 보낸 시간이 열정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런 표현해도 되나 싶은데 이젠 디지털 쪼가리 모으는 거는 안 할려구요. 어차피 시간나면 더 편하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게 도처에 있어 날 유혹하는데 일부러 하드 뒤져가며 듣지도 보지도 않을 거 아니까요.
2020년 6월 28일, 01시 50분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 앨범은 5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보기 드문 희대의 명반이자 나에게는 특별한 추억과 함께 기억되는 앨범이다. 매우 이른 나이에 독자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키스 재럿은 즉흥연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데 1975년 독일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콘서트는 그의 이런 재능이 퀘이사의 밝기로 빛나 만든 보석 같은 시간이었다.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콘서트였지만 제반 여건은 좋지 못하였는데 오페라 하우스에 애초에 원했던 그랜드 피아노 대신 다른 피아노가 배달되었고 다시 급하게 그랜드 피아노를 가져왔지만 튜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술자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일부 음역대는 쓸 수 없어 키스 재럿은 연주하는 동안 그 음역대는 피하면서 즉흥연주를 해야 했으며 쾰른까지의 오랜 운전으로 인한 피곤과 수면 부족, 음식 등 여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975년 1월 24일 밤 11시에 북두칠성처럼 반짝이는 보석 같은 음률을 펼쳤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쾰른 콘서트 앨범과 내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중학생 때였다. 당시 나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 나름대로 친구들과 음악 매거진도 만들고 음악 잡지 등에서 접한 신보 앨범들을 눈여겨봐 두었다 용돈을 아껴 카세트테이프로 사서 듣곤 했다. 당시에 주로 재즈나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성음에서 출반한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 앨범도 아마도 그 와중에 특별한 배경지식 없이 사서 들었던 것 같다. 하루는 시험 기간이어서 하교 후 늦은 저녁에 독서실에 가서 친구들과 공부를 했는데 공부가 잘 안돼서 쉴 겸 독서실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웠는데 겉멋에 입담배만 피다가 용기를 내서 속담배를 처음 펴 봤는데 기침도 나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아파서 독서실 내 자리로 돌아와서는 엎드려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마이마이를 틀었는데 그때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쾰른 콘서트 앨범이었다. 그 순간, Part I의 시작 부분에서 청아하게 콘서트 홀을 울리는 피아노 음이 비수처럼 날아와 고막을 때리고 가슴에 박히더니 한겨울 삭바람같이, 창가 처마 밑에 얼어내린 수정처럼 투명한 고드름같이, 시리도록 차갑고 청아한 멜로디가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어우러져 내 머릿속을 휘저었고 잠시 후 두통은 잦아들고 평안이 찾아왔다. 그렇게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 앨범은 인생의 플레이리스트에 등록되었다.
2020년 6월 13일, 21시 23분
때는 일본제국주의 강점시대 말기쯤으로 우리 외할머니께서 경남 창녕에서 부산으로 시집오셨을 때 이야기이다. 부산 서구 끝자락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송도 해수욕장이 있고 그 해안가 안쪽으로 장군산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외할머니께서는 당시 숲이 우거진 이 산의 깊숙한 곳에 집을 지어 살고 계셨다. 내가 어릴 때 갔을 때만 해도 숲은 온데간데없이 골목길이 이리저리 나 있고 곳곳에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지만 당시는 말 그대로 숲이 우거진 산속 외딴 집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 외할머니께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부엌에서 제사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잠깐 나갔다가 다시 와 보니 부엌 안에 퍼런 불덩이가 서 있었다고 한다. 부엌 출입문이 낮아 안에 서 있는 퍼런 불덩이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고 가슴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깜짝 놀라신 외할머니는 부엌칼을 들이밀며 "니 누꼬?" 하며 소리를 쳤는데 그러자 그 퍼런 불덩이가 휘익 부엌을 나와서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당시 송도 해안가 마을 사람들도 퍼런 불덩이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외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우르르 몰려왔는데 외할머니에게서 이런 사정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사 음식이 부정을 탔으니 다 버리고 새로 지은 쌀밥에 정안수로 제사를 지내라 하여 그리하셨다고 한다.
2020년 5월 21일, 19시 06분
어느 늦은 가을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강원도 봉포항 근처 펜션에서 오브들 네트워크 정기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차가운 소맥과 어우러진 짙푸른 밤바다의 파도 소리에 취한 한 회원분이 자기만의 인생론을 횡설수설 말씀하시었는데 꼬인 발음 속에서도 그 논리가 명확하였기에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나는 남자지만 여자들이 참 불쌍해. 우리나라 여자들보다 중동 국가에서 태어난 여자들이 더 불쌍해. 그 여자들은 사회적 억압으로 한평생 자기만의 꿈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하잖아. 그리고, 나는 조선시대 때 태어나지 않아서 행운이라고 생각해. 양반은 못 될 팔자라 종살이나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가 가오가 있지. 그리고, 임진왜란 때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해. 한국전쟁 때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고. 전쟁은 비참한 거야. 일제시대 때 태어나지 않은 것도 다행이야. 내가 독립운동이나 할 위인은 안 될 터이고 일본놈들 앞잡이가 되었을지도 모르잖아.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거든.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재벌 2세들 욕하는 거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어. 뭐 재벌 2세들 중에도 문제 있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반적인 재벌 2세들이 잘 사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싶거든. 걔들이 재벌 2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나 보니 재벌집 아들내미 딸내미인 거지. 있는 집안 사람들이 형편대로 누리고 사는데 뭐 그리 배알이 뒤틀려서 구시렁 들대. 그런 심보로는 부자는 못되고 평생 남 뒷다마나 까다가 가는 거야. 그런 면상들이 태어나는 거 선택할 수 있다면 당장 재벌 2세로 태어나려고 할걸. 요즘 말로 백퍼야 백퍼. 껄껄. 나는 지금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해. 나름 선진국에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별달리 잘나지도 못했지만 그럭저럭 밥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거든. 회원님, 사람의 인생은 태어날 때 거의 결정된다고 봐야 돼.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 태어나느냐도 운이고, 어느 부모님에게서 태어나느냐도 운이고. 전혀 자신의 능력이나 스스로의 결정과는 무관한 이 운이라는 것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야. 거의 80% 이상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이 운이라는 것이 결정하는 거거든. 나머지 20% 정도가 타고난 재능과 스스로의 노력이고. 이 얼마 안 되는 가능성마저도 신분 상승이 가능한 시대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야 비벼볼 수 있는 거고. 참 희한하지. 이것이 인생이야.
2020년 5월 16일, 17시 26분
밤공기가 선선했던 봄날의 어느 날 밤에 오브들 네트워크의 시니어 회원 한명이 인생의 진리의 한 면을 UFO에 빗대어 설명해 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UFO가 여기 뙇 나타나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니까. UFO를 본 사람이 봤다고 얘기를 하면 에이.. 잘 못 봤겠지. 벌레야. 이 지랄맞고 흔해빠진 의식의 흐름은 이성적인 척 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한 가식적 사회현상에 가깝다 이거지. 자자, UFO 말고 다른 얘기를 해보자. 뭔가 알듯 모를듯 어떤 이상한 감정이나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느냐, 그럴 때마다 겪는 혼란은 내가 느끼는 이 마음속 깊은 감정의 심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렵게 어떻게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이 내가 느낀 감정의 심상을 온전히 느낄 수가 있겠냐, 없지. 그건 불가능한 것이야. 그런데 UFO의 경우에는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얘기를 할 수가 있거든. 당시의 상황과 UFO의 형태와 행동을. 그런데 안 믿어. 믿고 안 믿고는 둘째고 말하는 사람을 괴짜나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거든.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은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의 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닌 현상을 말해도 안 믿고 못 믿는데 그걸 이해시키려 하는 행동 자체가 에너지 낭비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거야. UFO를 봤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무슨 과학적 근거를 대면서 이해시키려 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안 믿을 사람은 안 믿는다.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줘도 안 믿는다. 사진은 더더욱 안 믿지. 안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게 다 그냥 다 조작이거나 자연현상이야. 자기 앞에 UFO가 뙇 나타나서 착륙하고 거기서 외계인이 걸어 나와도 안 믿는다. 장담한다. 자기가 꿈을 꾸는 것이라고 믿을 걸. 꿈과 현실의 구분이 의미없는 경지에 이른 그런 현자들에게는 자기의 사고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모든 게 거짓이지. 이해시키려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살게 놔두면 된다. 각자도생은 싸우지 않고 어울려 사는데 요긴한 좌우명이니까 명심하고 각자의 판타지에서 건승하자.
2020년 4월 28일, 23시 38분
사람에게 열등감은 질투심과 더불어 자신을 추하게 만드는 주범 중 하나이다. 극복할 수 없다는 한계에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 감정은 사실을 현상에 꿰어맞추고자 억지 논리를 펴고 비이성적 사고에 휩쓸리게 하며 시간이 지나 이성에 반추하여 보건데 돌이킬 수 없는 스스로의 행동에 현자타임을 오게 하며 비참함에 스스로를 더욱 상심의 벼랑으로 내몬다. 이 모든 나락의 전개과정은 언제나 작은 손가락과 세치 혀에서 비롯된다. 원인인 열등감 자체는 없애기 힘든 법이니 말하기 전에 결과를 생각하고 쓰기 전에 논리와 읽는 사람의 관점을 고려하면 오해도 줄이고 나약한 자신의 치부도 숨길 수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흑역사를 줄일 수 있다. 이런 사고의 여과필터를 평소에 잘 관리해 주면 젊잖은 인생을 살 수 있다.
2020년 4월 17일, 03시 14분
세월이 흘러 명확하지 않은 오래된 추억의 한 조각을 찾는 것은 많은 것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공개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제한적인 면이 많아 흔한 경험은 아니다. 내가 1990년에 서면 지하상가에서 구입한 1200 BPS 모뎀으로 PC 통신을 시작한 이후 사설 BBS를 거쳐 케텔 시절부터 쓴 아이디가 'oriole'인데, 그 아이디를 쓰게 된 것에는 당시 한 우편물 봉투에 붙여진 꾀꼬리가 그려진 우표에 'oriole'라는 영어 명칭이 쓰여진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때에는 영어에 익숙치 않아 '오리올레'라고 발음하였고 심지어 나우누리에서는 한글 아이디로 '오리올레'를 사용했었다.
요 며칠 전부터 잠깐잠깐 생각에 그 우표를 보고 내가 그 아이디를 만든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고민하다 그 우표를 찾으면 되겠다는 생각에 검색을 통해 한국우표포털사이트에서 마침내 내 기억과 일치하는 바로 그 우표를 발견하게 되었다. 흐릿한 CGA 해상도였던 내 추억의 한 조각이 4K UHD 품질로 선명해진 것을 기념하며 그 추억의 우표를 감상해보자.
2020년 3월 10일, 22시 11분
30년도 훨씬 더 전 기억이 나네요. 아버지께서 저녁에 커다란 빨간 다라이에 밀가루 반죽을 해서 따뜻한 곳에 놔두고 잘 덮어두면 발효되면서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와요. 다음날 아침에 장사할 때 아버지께서 반죽을 한번 쑥 잡아때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휘리릭 돌리면 꽈배기 모양이 되는데 그걸 튀김기름에 넣으면 작은 기름기포가 잔망스런 소릴내면서 꽈배기를 고동색으로 튀겨주죠. 이렇게 잘 튀긴 뜨거운 꽈배기를 설탕접시에 살짝 굴려 설탕을 잔뜩 묻힌 후 호호 불면서 먹으면 꿀맛입니다.
2019년 7월 23일, 17시 20분
며칠 전 평소에 간직하던 생각을 돈가스를 먹으면서 얘기한 적이 있다.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는데 또 문득 생각이 나서 여기에 적어 본다. 인생의 전환 시점에 관한 경험을 말하고 싶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1층 진학상담방에 선배들의 학업성적을 카드로 만들어 놓고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선배들이 어떻게 학업능력을 성취해갔고 그렇게 해서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합격했다는 것을 기록해서 학생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해 두었었다. 나는 거기에 자주 드나들며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을까부터 갈수 있다면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어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곤 했다. 그 당시 나는 컴퓨터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전산학과(당시에는 컴퓨터라는 단어는 학과 이름에 쓰질 않았다)나 그 유사 계통의 학과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에도 전산학과는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러다가 진학상담방에서 알게 된 경영정보학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심 여기를 목표로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 당시 내 수준으로는 동국대 경주캠퍼스의 경영정보학과에 간당간당 했는데 입시 원서를 쓸 때쯤에는 내 실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었나 보다. 아버지께서 학교에 오셔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셨는데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던 나를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더니 경남대 회계학과에 원서를 넣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당시에 내가 주체적인 성격이었다면 거부를 했을 텐데 그때는 우유부단하고 생각의 폭이 그렇게 넓지 못했었다. 뭔가에 끌려가듯 그냥 하라는 대로 했는데 그 순간이 인생의 전환 시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니 거의 확신에 가깝다. 마치 다중우주 속의 회사원이 될 나와 다소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게 될 내가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특정 분야에 대한 나의 그런 열정을 이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열정이 불러올 결과도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누구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그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이고 내 인생의 전환 시점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 한순간, 당시의 나의 생각과 의지였다는 것이다. "싫습니다. 나는 경영정보학과에 원서를 넣겠습니다"라는 말을 못 한 나의 용기 없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게 경남대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시험을 쳤다. 시험을 치고 나서 해방감에 부산대학교 앞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다 집에 전화를 하니 아버지께서 내가 경남대학교에 합격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는 그리 기뻤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다음날인가 아버지께서 마산 경남대학교까지 직접 가셔서 합격자 명단 대자보에 붙어있던 내 이름과 수험번호를 오려서 가져오셨다.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비로소 기뻤다.
2019년 7월 19일, 21시 47분
살다 보면 거리를 두고 멀리해야 할 인간 군상들이 있다. 사업적 또는 인맥관계상 어쩔 수 없더라도 최대한 얽히지 말아야 할 그런 부류 중의 하나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인간 사회는 공동체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다양한 형태로 제시하고 그걸 어기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금지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법이나 규범의 가해자는 놔두고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힐책하는 경우를 수월찮게 접한다.
네가 멍청해서 당했다거나 그렇게 무식해서 세상살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둥의 헛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후벼판다. 인간 사회가 동물사회로 퇴보하는 것이다. 약자를 불의로부터 보호하고 권리를 지켜주는 것은 규범이나 법의 유무와는 또 별개로 인지상정人之常情 차원의 도리이기도 한데 이런 인간의 마음이 아닌 동물의 본능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은 허점을 보이면 언제든지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늑대와 진배없다. 정신적 수준이 떨어지고 인성이 나쁜 부류이니 반드시 멀리하는 것이 인생의 진리 중 하나이다.
2019년 7월 3일, 12시 22분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월내역은 나와 인연이 깊다. 언제부터인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게 자주 찾게된 이 곳은 농촌과 어촌의 모습을 반씩 간직하고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동래역에서 기차를 타고 월내역까지 가다보면 해운대를 접어들면서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제는 볼 수 없는 멋진 구간이 있었고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월내역은 작지만 참 정감가는 곳이었다. 역을 나와서 바닷가를 걷거나 철길을 건너 논두렁 흙길을 걷다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평온해졌다. 현재 월내역은 동해선이 복선전철화 되면서 사라졌고 월내역 옆 작은 오솔길을 따라 가면 있던 낡은 육교도 철거되었다. 이 육교 위에서 월내 앞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했는데 아쉽다.
2019년 6월 19일, 23시 51분
드라마 속 유명한 대사이기도 한데, 인간은 누구나 뒤에서 남을 욕한다는 말 참으로 사실과 합치하는 말인데, 라떼는 말이야, 정말 뒤에서 깠거든. 근데 요즘은 대놓고 공개적으로 까더라고. 호모 까르보엔스인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자 퇴보의 산물이다. 진화한 어른들의 논리는 이렇다. 누군가 나를 욕한다, 그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도 누군가를 욕한다. 이것도 현상이다. 하지만, 뒤에서 당사자가 없을 때 까는 것은 기본적 예의다. 여기에서 상대적인 논리가 적용되는데 남이 나를 욕해도 내가 그걸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사자가 알 수 없게 뒤에서 욕하는 미덕을 가지는 것이다. 요즘에는 너무 공개적으로 누구나가 알 수 있게 욕을 한다. 누군가 특정인을 미끼로 던지면 우르르 몰려들어 한마디씩 보태고 몰아간다. 진화한 사람들이 말려도 보지만 소용없을 때도 많다. 퇴보한 것이다. 달콤한 사탄의 미끼를 쳐 물었다. 무리로 상대방을 까고 동료의식을 느끼고 희열을 느낀다. 지옥행 특급열차 1등석 표를 사기 위해 미친 듯 마일리지를 모으며 기뻐 날뛴다. 그렇게 무리 속에 있지만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자신이 그랬듯 누군가 자신을 타겟으로 삼아 씹고 뜯고 맛보며 즐길까 봐. 하지만, 괜찮다. 자신만 모르면 되니까. 눈 감고 귀 닫고 살면 된다.
2019년 6월 16일, 14시 50분
꿈에서 여러 번 본 풍경은 아닌 것 같은데 계속 기억에 남는 풍경이 있습니다. 그 풍경이나 분위기, 느낌을 자세하게 묘사하기에는 나의 표현력이 너무 부족하여 내게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해 왔습니다만 없는 재능이 생길 리는 만무하고 횡설수설이겠지만 글로 남겨봅니다.
꿈이 늘 그렇지만 시작은 기억이 없는 법입니다. 어느 순간 나는 해안가 비탈진 산등성이 또는 산복 도로 아래 비스듬히 경사진 수풀 지역에 서 있습니다. 눈앞에 출입을 막고 있는 철문이 있고 나는 그 문을 열고 나무와 풀들이 가득한 길을 들어섭니다. 걷다 보니 하늘에는 해가 중천에 다다르고 있고 어느 순간 수풀 지역을 빠져나왔습니다. 왼쪽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고 비스듬한 산등성이 가운데로 길이 나 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달려갑니다. 저 앞의 꺾인 길을 돌아가니 산등성이 길 아래로 그리 크지 않은 해변이 펼쳐져 있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고 해변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면 위로 높이 솟아오른 원통형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다이빙을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꿈에서 본 이 풍경은 부산 남부민동과 송도 해수욕장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송도는 내가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사람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감수성은 40여 년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그때의 이미지를 꿈에서 그려낼 정도로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도 감성적 순간을 복기해보면 성인이 된 후의 그 어떤 경험도 어린 시절, 학창시절의 추억만큼 강렬하지도 않고 오래가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추억은 방울방울..
2018년 9월 21일, 00시 37분
꿈은 내재된 무의식의 세계를 탐험하는 자신의 태양態樣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는 행위입니다. 평소의 생활에서 하지 않던 행동이나 지식이 발현되기도 하고 익히 알고 있던 지식이나 사고의 다른 해석도 경험하곤 합니다. 경험적으로 꿈에서의 제諸 현상이 자신에게 내재된 의식이나 지식이 원인인지 아니면 외부의 다른 것에 의한 영향이 있는 것인지 불확실하지만 놀라운 것은 자신을 둘러싼 미지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행동과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놀라운 경험은 꿈속에서 마저도 불명확한 경우가 많고 꿈에서 깨어난 직후가 아니면 왜곡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대부분 꿈에서 깨어난 직후의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최대한 기억하는 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기억나는 것은 비논리적이어도 그대로 기록하고 흐릿한 기억은 사물이나 느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이트의 내용이 방문자에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내 꿈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18년 8월 31일, 17시 32분
옛날 아주 먼 옛날 부산 송도 윗길과 아랫길 갈라지는 언덕 위에 롤라장이 있었다. 당시 나는 송도와 가까운 초장동에 살았는데 국민학교 4~5학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과 롤라장에 자주 갔었는데 타는데 서툴러서 트랙을 느릿느릿 어설프게 돌면서 재밌게 놀았다. 롤라장 안에는 오락기들이 여러 대 있었는데 지금 생각나는 게임은 권투장갑 낀 캥거루가 나오는 게임과 남코에서 만든 워프 앤 워프라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동킹콩도 즐겼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부근에 숲속 작은 오솔길이 있었고 벤치가 있었는데 당시 친하게 지냈던 여자친구들 3명과 벤치에 앉아서 재밌게 얘기하며 놀던 추억이 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아버지와 송도 친척집에 갈 때에는 롤라장 아래에 범퍼카 트랙이 있었고 생전 처음 타보는 범퍼카를 아주 재밌게 타고 놀았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서른이 넘어 갔을 때는 롤라장은 간 곳이 없고 교회가 들어섰고 부근의 숲속 오솔길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최근에는 옛날 외갓집이 있던 송도 해변 윗동네가 재개발이 되면서 옛날 모습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정답던 풍경들이 다시 볼 수 없는 마음속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19년 5월 25일, 01시 05분
옛날 일드 중 트릭에 보면 여주인공 엄마가 하는 대사 중에 "말에는 힘이 있다"는 부분이 있다. 여러 사람이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지만 쉽게 간과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일찍이 깨달은 바이고 생활 속에서 늘 유념하지만 지키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말이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표현이나 감정표현은 정말 자신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스스로를 나락을 빠트리는 악마의 속삭임 같은 것이다. 하물며, 사실이 아닌 내용을 공공에게 말하거나 부정확한 사실을 마치 진실인 양 확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큰 죄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늘 표현은 겸손하게, 정확하지 않으면 적어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거나 일말의 의심이 든다면 반드시 재고하고 단서를 달아 그로 인해 유발될 타인의 오판을 방지하는 것이 교양인의 덕목이다. 현실을 보면 넷상이나 사회생활에서 쥐뿔도 모르면서 마치 진실인 양 확신에 찬 발언을 내뱉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릴 때야 미천한 근자감이라도 있을 터이지만 나이 드실 만큼 드신 분들이 더한 면이 많은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두 손은 공손히 모으고 귀는 열고 말은 삼가는 것이 볼품없는 인품을 나이빨로 감추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오늘도 티비만 틀면 나오는 비루한 인생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2019년 5월 24일, 15시 45분
인터넷상의 수많은 웹사이트에 쓰이는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방법의 하나로 전문적인 프로그램이나 수첩에 적어둘 필요가 없는 아래 방법을 제안합니다.
이 방식은 비밀번호를 3개의 블록으로 구성합니다.
비밀번호 = A 블록 + B 블록 + C 블록
A 블록과 C 블록은 사용자가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자기만 아는 단어와 특수문자로 구성됩니다. 통상적이고 관례적인 비밀번호의 구성 순서상 A 블록은 영문자와 숫자의 조합이 추천되고, C 블록은 영문자 또는(그리고) 숫자와 특수문자의 조합이 적합합니다. 사용자는 단지 A 블록과 C 블록을 기억하면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멀더는 평소 달에 관심이 많아 아폴로 프로젝트에 대한 지식이 풍부합니다. 그래서, A 블록은 'Apollo', C 블록은 '#11'로 정했습니다. 이 두 블록의 단어는 개인의 관심사라서 쉽게 잊혀지지도 않지만 잊어버릴까 염려된다면 수첩에 적어두거나 윈도의 메모장에 입력해서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도 크게 상관없습니다. 혹시나 유출되어도 아래 B 블록의 규칙을 모른다면 아무도 사용자의 완전한 비밀번호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B 블록은 접속하려는 웹사이트를 연상기억법에 기반한 규칙을 통해 기억할 수 있는 단어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네이버의 경우에는 네이버의 상징색인 녹색을 연상할 수 있게 직접적으로 'green'이라고 하거나 또는 한글 단어 '녹색'을 영문키보드로 타이핑한 'shrtor'이 적당할 것입니다.
이제 A, B, C 세 블록에 대한 자신만의 규칙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방식에 따른 멀더의 네이버 비밀번호는 A, B, C 블록을 조합한 'Apolloshrtor#11'이 될 것입니다.
사용자가 웹사이트의 비밀번호를 정할때 이 방식을 활용한다면 비밀번호 입력시 사용자가 실제 떠올려야 하는 것은 B 블록, 해당 웹사이트를 기억하는 자신만의 연상기억법에 의한 단어규칙 뿐이므로 특정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수첩을 뒤적일 필요 없이 빠르고 편리한 로그인이 가능함과 더불어 만약 해당 사이트가 해킹을 당해 사용자의 비밀번호가 유출되더라도 각 사이트마다 비밀번호는 제각각 상이하므로 다른 사이트에까지 피해가 확산되지 않는 보안상의 안전성도 담보할 수 있습니다.
2018년 2월 10일
웨이크 노먼에게 있어서 그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적어도 그랜드 뉴욕시¹안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사람은 그가 유일했으며 그의 결정은 곧 지루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상원 의원 제럴드 코헨은 시장의 권한으로 그의 강제 구인을 주장하고 나섰고, 이에 맞서 종군기자이자 토론 프로그램 사회자로 유명한 앤서니 카멜은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존중받아야 한다며 노먼의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신이 허락한 지난 3개월간의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노먼과 같은 결정을 내린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최초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처음 결정을 철회하고 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이 제시한 마지막 날, 시장 페더릭은 직접 노먼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결정을 되돌릴 것을 설득했다. 노먼은 시장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자신의 결정은 확고하며 자신은 지구 외 다른 행성에서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지구에서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하루 종일 친구들과 저명인사들의 설득 전화가 이어졌고 그는 결국 전화 플러그를 뽑아야 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 서로에게 키스를 하며 지구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행성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그 시각, 노먼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랜드 뉴욕시에서 가장 높은 센트럴 뷰엥 빌딩 104층의 그의 사무실에 앉아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노먼은 그가 마음을 굳힌 이후 때때로 들곤 했던 불안감이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지난여름 갑자기 천공에 모습을 드러냈던 신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앞에 나타났다. 노먼은 잠시 놀랐지만 이제 자신에게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무덤덤하게 그 앞의 신을 마주 보았다.
신은 그에게 모두가 떠난 지구에서의 삶은 노먼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며 그것은 자신의 뜻에 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파멸로부터 노먼을 구하고 싶다고 말하며 내일 아침 자신과 함께 지구를 떠날 것을 제안했다. 노먼은 신의 제안에 감사하며 지구에서의 삶이 자신의 운명의 끝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를 바라보던 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창밖 그랜드 뉴욕시의 야경을 한동안 바라보다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밤새 사무실 소파에 누워 잠을 뒤척인 노먼은 센트럴 뷰엥 빌딩 201층 옥상에 올라갔다. 느려진 지구의 자전²은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까지 늦춰버려 이제 지구 상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매일 느려지는 고장 난 탁상시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떠오르는 태양이 천천히 금빛 물결을 한줄기씩 쏟아붓자 그랜드 뉴욕시의 고층건물 사이로 황금빛 햇살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사이로 그랜드 뉴욕시의 시민들을 태운 신의 배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백 척의 신의 배들은 곧 하늘을 가릴 듯 뒤덮었고 천천히 선두를 우주로 향하더니 곧이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의 배들이 사라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구 자전이 느려지면서 이제 바람은 거의 불지 않고 새들의 지저귐도 사라진지 오래인 이 거대 도시는 사람의 자취마저 사라져 적막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지구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인간이 된 노먼은 스스로의 인생을 통해 완벽하게 혼자가 된 순간을 맞아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하지만, 노먼은 곧 그 갈증이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다.
느릿느릿 태양은 하늘 가운데 다다르고 세상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순간이 자신의 마지막 기억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먼이 한 발을 허공을 향해 뻗자 곧 그의 몸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곧 갈증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는 갑자기 암흑이 찾아왔다.
노먼은 눈을 떴다. 어둠이 아침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지더니 아주 흐릿하게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상 500 미터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이 천국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차츰 시야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그가 처음 본 것은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로봇 부속품들이었다. '천국에 로봇이라니' 하는 생각을 하며 그는 팔을 움직여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은 감각이 없었다. 고개를 겨우 돌려보니 자신의 팔은 반이 부서져 나뒹굴고 있었다. 다리도 감각이 없었다. 순간, 눈앞에 신체 손상도를 나타내는 그래픽이 표시되더니 잔여 에너지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등이 보였다. 곧이어 노먼은 눈앞의 장막이 걷히는 것을 느꼈다.
모든 진실을 한순간에 직관적으로 깨닫게 되면 이런 기분일까. 노먼은 자신의 존재를 찰나에 스스로 깨달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에너지양을 체크했다. 채 10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웨이크 노먼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0시간 후면 다시는 깨어날 일 없을 테니.
2012년 7월 20일, 23시 31분 27초
내 학창시절을 낭만에 꿈꾸게 한 영화, 라붐 2. 중학교 때 이 영화의 OST 앨범을 서면 지하상가 레코드점에서 보고 용돈을 모아 사서는 안방 인켈 전축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속지에 적힌 영어가사를 띄엄띄엄 서투르게 읽으며 따라 불러보기도 했다. 이 때 이후로 소피 마르소의 팬이 된 나는 개봉하는 소피 마르소의 영화를 변두리 개봉관까지 찾아다니며 몇번씩이나 보곤 했었다.
2011년 4월 19일, 18시 26분 42초
몇년 전, 5월 어느 날. 무궁화 열차에 자전거를 싣고 남창에 갔다. 따사로운 햇빛이 온 누리를 뒤덮고 있던 남창은 오랜 친구처럼 날 반겨주고 나는 어릴적 골목길을 닮은 낡은 도로를 가로질러 남창의 넓은 들판에 멈췄다. 드넓은 들판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두렁길을 한참을 달리고 달리며 따뜻한 풀내음과 산들바람을 한 가득 마음속에 담았다.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코끝에 풀내음 흙냄새의 따뜻한 바람이 스쳐지나가고 눈 앞에는 눈부시게 밝은 태양 아래 아직은 덜 익은 초록빛 벼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2011년 4월 5일, 14시 48분 54초
고등학교 시절, 어느 늦으막한 오후 하교길 언덕을 내려갈 때 주홍빛 노을이 나무잎 사이로 비치고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쳐지나갔다. 터벅 터벅 걸어 집으로 가다보면 어느새 거리에는 어둠이 내려앉고 차들의 헤드라이트와 경적소리는 길가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섞여 내 피곤한 어깨를 두드리곤 했다. 그런 밤이 머무는 곳에 내가 있었다.
2011년 4월 3일, 21시 46분 33초
작고한 조흔파가 지은 홍길동전을 어릴 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촌스런 표지에 속지는 누런 갱지에다가 가로글이었는지 세로글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아무튼 길동이가 아버지를 떠나서 산에 들어가 패거리를 모아서 활약하는 장면을 꽤나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기억나는 대목도 있는데 스승인 무슨 도인인가 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진 저 쪽 계곡에 있는 불상에 놓인 물체를 활로 쏴 보라고 하는데 길동이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맞추느냐 하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맑은 정신으로 집중해서 노려보면 주먹만하게 보일거라고 해서 길동이가 매일 수련을 하니 정말로 엄청 크게 보여서 활로 맞추었다는 부분입니다. 어린 마음에 진짜인가 싶어서 며칠동안 먼 산을 째려보곤 했었지요.
2005년 4월 19일, 00시 45분 11초
채팅이라는 말이 참 정겹게 느껴지던 PC통신 시절의 영화로 주제가가 참 좋았지요. 두 주인공이 좁은 계단에서 스쳐가는 장면은 꽤나 유명해서 다른 영화에서 패러디하곤 했었습니다. 처음 영화가 시작될 때 달리는 자동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목소리가 비 내리는 차창 밖과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 영화를 통해 Velvet Underground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오랫동안 Pale Blue Eyes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5년 2월 25일, 15시 14분 11초
저는 중학교 때 학교 앞에 있던 '형제 컴퓨터 학원'이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애플을 접하면서 컴퓨터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후에 관심은 있었지만 대학 진학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있다가 1990년에 대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있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동네 컴퓨터 학원에서 젤 처음 배운 것이 도스였고 그 후에 'PC 어드밴스' 라는 잡지에서 읽은 통신에 빠져들었지요. 보스토크라는 애뮬레이터를 개발한 김원준이라는 사람이 쓴 연재물을 읽으면서 참 멋지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실제 모뎀으로 통신에 접속했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저는 기억력이 별로라서 그 때 정말 감격스러웠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하간에 그 후로 시분제 파동이 지나가고 머드에 빠졌고..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나는 리눅스를 알게 된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처음에 리눅스를 알게 된 것은 군대 있을 때 지금은 나랑 친구먹지만 그 때는 새까만 후배였던 한 녀석 덕분이었는데 플로피를 일일이 갈아 넣으며 설치를 하고, 하루는 커널 컴파일을 하는데 하루가 다 가도록 끝이 나지 않아서 어이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10분이 채 안 걸리는 작업을 그때는 하루 종일 했었다니 컴퓨터 환경의 변화는 빛과 같은 것인지.. 그 후에 어렵게 커맨드를 익히고 엑스윈도를 띄우고 매니저도 바꿔보고 재미를 들였고 제 컴퓨터에서 머드 서버도 돌려보고 ftp 서버도 돌려보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동안 지냈던 것 같습니다.
2004년 9월 17일, 12시 33분 23초
오늘 디시인사이드 추억 갤러리에서 40계단 사진을 보고 저 어릴적 살던 초장동 올라가는 길에 있던 70계단이 생각이 났습니다. 작년에 두번 찾아갔었는데 제 기억속에 남아있는 풍경은 몇 안되더군요. 70계단이 어디였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던데 아마 계단을 없애고 오르막길로 만든 모양입니다. 동물원의 혜화동이라는 노래에 "어릴적 넓게만 보이던 작은 골목길" 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실제 제가 살던 집 골목을 찾아가보니 진짜 좁은 골목길이던데 제 기억속에는 마치 운동장처럼 남아 있습니다. 옛날 살던 집도 찾아봤는데 허물고 새로 지었는지 거기가 맞나 헷갈리더군요.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곤 학교가는 길에 있던 언덕길과 오래된 나무 정도. 하긴 몇십년이 흘렀는데..
오래된 얘기하나 더 할까요? 초장동에 살때 얘긴데, 부모님은 그 때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분식집을 했는데 꽈배기도 팔고 고로케도 팔고 여름에는 팥빙수도 팔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때 가게안에 조그만 액정이 달린 오락기도 있었는데 갤러그 같은 게임이었는데 나중에 하도 많이 해서 눈감고 해도 한번에 클리어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더군요. 어느 가을쯤 저녁이었나.. 그 때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해서 가게를 제가 봐야 했는데 꽈배기를 파는데 계산을 못해서 두 배씩 더 넣었는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이 주냐며 그러니까 옆에 있던 동네 아주머니가 제대로 넣어서 팔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때 제가 국민학생이었는데 시간 보는 법을 몰라서 그 가게 안에 있던 조그만 방에서 아버지한테 특훈을 받던 기억도 나는군요. 되게 혼나면서 배워서 지금은 시계를 잘 보니 다 아버지 덕분이지요. 다 오래된 얘기들이네요.
2004년 6월 12일, 00시 35분 34초
저는 영화를 볼 때 한 번 본 영화를 계속 반복해서 보는 경향이 있지요. 중학교 때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을 왕조현의 매니아였던 친구와 함께 개봉하는 극장을 찾아다니며 본 적이 있고, 후에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 2도 혼자서 수십 번을 넘게 보았습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록 제가 보는 영화들은 한두 번을 넘기지 못했는데 중경삼림과 접속은 예전의 열정으로 무던히도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 접속에서 이 음악이 나오는 장면이 아마 전도연이 드라이브를 하다가 사고가 날 뻔하는 장면인데요, 이 대목은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심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인데 사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자동차는 한석규의 헤어진 전 애인이 몰던 차였고 결국 이 사건이 전도연과 한석규가 맺어지게 되는 묘한 인연의 단초가 되는 장면입니다. 이 영화의 삽입곡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는 마치 시를 읊는 듯한 느린 템포와 허스키한 보이스에 뭔가 슬픔과 안타까움, 오래전 추억이 묻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곡입니다.
2003년 6월 25일, 20시 27분 56초
어릴 적에 이사를 자주 다닌 나는 국민학교를 3군데 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처음 다녔던 학교에서 5학년때 전학 갈 때까지가 내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당시 나랑 친했던 친구가 3명이 있었는데 전부 여자친구였습니다. 그들 중 나머지 두 명은 어렴풋이 얼굴만 기억날 뿐이지만 한 명은 이름과 얼굴 그리고 몇 가지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기억에 남아있지요. 이 노래도 아마 그 아이가 즐겨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학 가기 전날 그 아이가 나에게 작별 편지를 주었는데 나는 미처 그러질 못한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이사다니면서 그 편지는 어디 갔는지 없지만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2003년 6월 25일, 10시 20분 03초
영화 라붐 2 이후 소피 마르소의 왕팬이 되어버린 나는 이 영화 역시 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시작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케이블카 안에서 스키복 차림의 소피 마르소가 모자와 고글을 벗자 카메라가 그 모습을 천천히 훑어내려가며 보여주는데 나도 모르게 "아..참 예쁘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이 영화에서 성인이 되어버린 소피 마르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때가 소피 마르소가 제일 아름다웠던 시절 같습니다. 이 영화가 나에게 끼친 영향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영화에서 소피 마르소가 남자 주인공과 대화하다가 키스 재럿을 좋아한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후 나도 키스 재럿을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특히 쾰른 콘서트 앨범은 내 힘든 고등학교 생활을 견디게 해 준 아스피린 같은 음악이었지요.
2003년 6월 17일, 14시 00분 45초
Copyright 2003 김용진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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